
유럽이 미국의 결제 시스템, 특히 비자와 마스터카드와의 의존도를 신속히 줄여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전통적인 동맹국인 미국과 유럽 간의 관계가 퇴색하면서, 향후 양측 관계가 더욱 악화될 경우 미국 결제 시스템의 지배력이 무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마르티나 바이머트 유럽결제이니셔티브(EPI) CEO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는 국제 거래를 처리하는 시스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EPI는 유럽의 16개 은행 및 금융 서비스회사를 포함하는 컨소시엄으로,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이머트 CEO는 “물론, 각국에는 우수한 국내 결제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국경을 넘는 유럽 차원의 결제 시스템은 부족하다”며 “각국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데이터에 따르면,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21개국) 카드 거래의 약 66%가 미국의 비자와 마스터카드로 이루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유로존 내 13개 국가에는 이러한 미국 카드사를 대체할 자체 결제 시스템이 부족한 상황이다.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 결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 사용률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현금 이용이 줄어들면서, 유럽의 정책 입안자들은 미국 결제 기업의 영향력이 미·유럽 관계가 악화할 경우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전 ECB 총재는 “깊은 통합이 모든 파트너가 동맹이 아닐 경우 사용될 수 있는 상호 의존성을 만들어냈다”며 “이전에는 상호 견제의 원천으로 여겨졌던 행위가 지금은 협상과 통제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EPI는 오는 2024년, 애플페이의 대안으로 ‘베로(Wero)’라는 유럽형 디지털 결제 시스템을 출시할 예정이다. 현재 베로는 벨기에, 프랑스, 독일에서 약 4,850만명의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2027년까지 온·오프라인 매장에서의 결제 서비스로 확대할 계획이다.
바이머트 CEO는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에서 국경을 초월한 유럽 결제망 구축이 중요한 판단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ECB는 과거의 민간 주도 결제 프로젝트들이 표준 통합과 규모 확장에 실패했음을 지적하며, 유로존 전체에 걸쳐 통화 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디지털 유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유로는 정치적 및 금융적 반발에 봉착해 있다. 일부 은행은 민간 노력을 약화시키는 데 반대하여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FT는 이번 연말 유럽의회에서의 표결에서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디지털 유로 도입 시점이 지체될 경우, 지정학적 긴장이 심화될 경우 이 시스템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등장하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바이머트 CEO는 “디지털 유로가 도입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것이며, 이는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종료 이후의 일일 것”이라며 “우리는 이미 시기를 놓치고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