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아씨는 1982년 3월 25일 생후 10개월 만에 미국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날 그는 다른 네 명의 아기들과 함께 미국인 입양 부모의 품에 안겼다. 이진아씨의 입양 과정은 비극적이고 아픔이 가득한 여정이었다. 이씨의 친어머니는 그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20년 이상 그를 한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이씨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에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 고 말했다.
이진아씨는 매사추세츠주에서 여름에는 해변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와 스케이팅을 하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다섯 살 무렵, 이씨는 양어머니로부터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는 “우리 한국 엄마는 어디에 있나요?”라고 자주 묻곤 했다. 이러한 질문은 이진아씨에게 두 가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어려움을 안겼다.
그가 11살이 되었을 때, 양아버지가 정신질환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면서 그는 내면의 슬픔을 겪어야 했다. 5년 후 양부모가 이혼하게 되자, 이씨는 한국이라는 고향을 그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씨는 한국에서 친어머니와 보낸 시간이 고작 4~5개월이라는 점에서 자신이 입양된 이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친어머니가 “나를 돌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해 입양을 보냈다”며 자책감도 느꼈다고 설명했다.
이진아씨의 입양 과정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1981년 9월부터 수원의 아동복지시설 ‘경동원’에 머물다가 홀트아동복지회의 후견인 검토를 거쳐 1982년 해외로 입양됐다. 이 과정에서 친어머니의 동의는 받지 않았고, 그의 입양 서류에는 ‘버려진(abandoned)’ ‘입양 가능한(adoptable) 아이’라는 단어만이 적혀 있었다. 이씨는 “과거 해외 입양인들의 기록이 쉽게 작성되고 수정됐다”며 비판했다.
이씨는 2002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친어머니와 만나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가 미국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짧은 만남 후 “다신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슬픔과 혼란을 겪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친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씨는 “친어머니는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깊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이진아씨는 총 네 번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는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고, 올 여름에도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씨는 아이를 입양 보내야 했던 친생부모들에게 “저희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다. 그는 한국 입양인과 친부모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